🎭 사기꾼 열전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 엘리자베스 홈스, 천재에서 죄수가 되기까지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 엘리자베스 홈스, 천재에서 죄수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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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한 방울. 손가락 끝을 살짝 찌른 단 몇 마이크로리터의 혈액으로 200가지 질병을 동시에 진단한다. 4시간 안에 결과가 나온다. 병원 실험실도 의사도 필요 없다. 동네 약국에서 단 50달러에. 미국 전 국무장관이 믿었다. 미디어 재벌이 1억 달러 넘게 투자했다. 국방부가 군인 건강 검진에 도입하려 했다. 기업 가치 90억 달러. 그런데 이 기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엘리자베스 홈스의 이야기다.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타올랐다가,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스타트업 신화. 그리고 그 중심에 선 한 여성이 법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2003년 스탠퍼드 자퇴 — 세상을 바꾸겠다는 19살 소녀의 선언

2003년, 스탠퍼드 대학교 화학공학과 1학년. 엘리자베스 홈스는 또래와는 확연히 다른 눈빛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이미 중국어를 비즈니스 수준으로 구사했고, 베이징에서 스타트업 관련 인턴십을 마쳤다. 스탠퍼드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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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 손에는 자퇴 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교수는 놀랐다. 홈스는 성적도 우수했고 장학생이었다. 하지만 홈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세상을 바꿀 회사를 세울 겁니다.”

그녀는 스탠퍼드 장학금 7만 5,000달러를 들고 회사를 설립했다. 이름은 테라노스(Theranos). 혈액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라(thera)‘와 진단을 뜻하는 ‘다이아그노시스(diagnosis)‘를 합쳐 만든 조어였다. 그 이름만큼 홈스의 외모와 언행도 철저하게 설계됐다. 항상 검정 터틀넥을 입었다. 목소리를 인위적으로 굵고 낮게 다듬었다. 인터뷰에서는 어떤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유지했다.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빌려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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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즉각 반응했다. ‘여성 스티브 잡스.’ 홈스는 그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잡스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잡스는 제품을 완성한 뒤 세상에 공개했다. 홈스는 반대였다.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먼저 발표하고, 그 다음에 만들려 했다.

테라노스의 핵심 제품 이름은 에디슨(Edison)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극소량의 혈액만으로 수백 가지 검사를 자동 수행한다는 소형 기기였다. 내부 기록이 공개됐을 때, 에디슨이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검사 항목은 기껏해야 12가지였다. 그것도 반복 검사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수준으로 불안정하게.

실리콘밸리가 열광한 순간 — 헨리 키신저도 이사회에 앉혔다

실리콘밸리에는 언제나 ‘다음 잡스’를 기다리는 투자자들이 있다. 혁신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젊은 창업자. 홈스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문제는 아무도 그 기술을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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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노스의 이사회 명단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의료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이런 이름들이 자리를 채웠다.

  • 조지 슐츠(George Shultz): 레이건 정부 국무장관
  •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닉슨 정부 국가안보보좌관
  •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전 해병대 대장, 훗날 트럼프 정부 국방장관
  •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 클린턴 정부 국방장관

홈스는 정치적 인맥과 군사적 신뢰성으로 이사회를 채웠다. 의료 기술의 실체를 검증할 전문성이 없는 인물들이었지만, 그 이름들이 주는 후광 효과는 막대했다. 투자자들은 생각했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이 이사로 있는 회사라면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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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은 혼자서 1억 2,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월마트 창업주 샘 월턴의 가문도 이름을 올렸다. 총 투자 유치액은 9억 달러. 기업 가치는 90억 달러로 치솟았다.

포춘지는 홈스를 표지에 올리며 ‘다음 잡스’라고 불렀다. 포브스는 그녀를 미국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로 선정했다. CNN, NBC, ABC가 앞다투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이사회에 의사 한 명, 의공학자 한 명이 없는지를. 실리콘밸리의 집단적 흥분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삼켜버렸다. 그 사이, 월그린스 전국 1,200여 개 지점에서 실제 환자들이 에디슨 기기로 검사를 받았다. 당뇨 진단, 암 조기 검사, 심장 기능 검사. 생사가 달린 결과들이었다.

균열의 시작 — 손자를 배신자로 만든 조지 슐츠의 딜레마

테라노스의 실상을 처음 눈치챈 사람들 중에는 내부자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인물은 이사회 멤버 조지 슐츠의 손자, 타일러 슐츠(Tyler Shultz)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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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는 스탠퍼드를 졸업하고 2013년 테라노스에 입사했다. 에디슨 기기의 성능을 직접 테스트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같은 혈액 샘플을 반복 검사하면 매번 다른 수치가 나왔다. 당뇨 혈당 수치가 검사마다 달랐다. 이건 오차 범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환자에게 위험한 수준이었다.

더 심각한 사실도 확인됐다. 에디슨이 처리하지 못하는 검사 항목들은 조용히 경쟁사 퀘스트 다이아그노스틱스(Quest Diagnostics)의 기기로 처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지에는 여전히 테라노스 로고가 찍혔다. 환자도, 의사도, 투자자도 몰랐다.

타일러는 내부 보고를 시도했다. 경영진은 그를 막았다. 그는 뉴욕주 보건부에 익명으로 제보를 넣었고, 조부인 조지 슐츠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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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슐츠의 선택은 손자의 편이 아니었다. 이사회 멤버로서의 지위, 회사에 쏟아부은 신뢰, 수십 년간 쌓아온 판단력에 대한 자부심. 그 모든 것이 손자의 증언보다 무거웠다. 타일러는 이후 테라노스 법무팀으로부터 소송 협박을 받으며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변호사 비용만 수십만 달러가 들었다.

테라노스는 내부 고발자를 막는 시스템을 정교하게 운영했다. 비밀 유지 계약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퇴사 직원들에게도 소송 위협이 날아왔다. 훗날 한 전직 직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회사에서 진짜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다음 날 해고됐습니다. 그리고 변호사가 찾아왔습니다.”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은 아직 건재했다.

존 카레이루의 특종 — 월스트리트 저널이 제국을 무너뜨린 날

2015년 10월,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사 한 편이 실렸다. 기자 이름은 존 카레이루(John Carreyrou)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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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루는 약 1년에 걸쳐 이 기사를 취재했다. 전직 테라노스 직원들과 익명의 내부 고발자들을 만났고, 의료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으며, 에디슨 기기의 실제 성능 데이터를 입수했다. 기사 제목은 단순했다.

“테라노스의 혈액 검사 기술에 의문이 제기되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홈스는 반격에 나섰다. 테라노스 법무팀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송을 예고했다. 홈스는 직접 CNBC에 출연해 기사를 부인했다.

“저희 기술은 완벽히 작동합니다. 이것은 혁신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의 공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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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미노는 이미 쓰러지기 시작했다. 미국 의료보험 감독 기관인 CMS(Centers for Medicare & Medicaid Services)가 조사에 착수했다. 2016년 1월, CMS는 테라노스의 뉴어크(Newark) 실험실이 환자에게 즉각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험실 운영 자격이 취소됐다. 홈스는 2년간 혈액 검사 사업 운영이 금지됐다.

월그린스는 계약을 종료했다. 세이프웨이도 손을 뗐다. 루퍼트 머독은 투자금 1억 2,500만 달러 전액을 손실로 처리했다. 포브스는 홈스의 재산 추정치를 45억 달러에서 0달러로 수정했다.

카레이루는 이 사건을 책으로 엮었다. 2018년 출간된 《배드 블러드(Bad Blood)》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가짜로 될 때까지 척하라(Fake it till you make it)‘는 격언이 의료 분야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세상에 알린 책이었다.

법정의 홈스 — 유죄 판결 후 11년 징역,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

2018년 6월, 미국 연방 검찰은 홈스와 테라노스의 전 COO 라메쉬 발와니(Ramesh ‘Sunny’ Balwani)를 전선 사기 및 투자자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이 두 사람은 한때 연인 사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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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의 재판은 2021년 8월 시작됐다. 검찰은 홈스가 투자자와 환자 모두를 조직적으로 기만했다고 주장했다. 홈스 측 변호인은 그녀가 발와니에 의해 정서적으로 통제당한 피해자였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홈스는 직접 증인석에 섰다. 수십 시간의 증언 동안, 그녀의 답변은 일관됐다.

“저는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기술이 완성될 수 있다고.”

2022년 1월, 배심원단은 투자자 사기 4개 항목에서 유죄를 평결했다. 환자 사기 항목은 무죄였다. 투자자를 고의로 속인 것은 인정했지만, 환자에 대한 고의성은 입증이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2023년 5월, 홈스는 텍사스주 연방 교도소에 입소했다. 형량은 11년 3개월이었다. 선고 이후에도 홈스는 항소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두 아이를 낳으며 입소를 늦췄지만, 결국 법원의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 발와니 역시 별도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홈스가 한 마지막 공개 발언은 이것이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을 바꾸려 했습니다.”

판사는 형량을 조정하지 않았다.

테라노스 사건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지 않다. 실리콘밸리의 ‘가짜로 될 때까지 척하라’는 격언은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다. 틀린 코드는 업데이트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틀린 암 진단은 환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의료는 다르다.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돌려받은 돈은 거의 없다. 오진을 받은 환자가 몇 명인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테라노스의 공식 청산은 2018년에 이루어졌다. 90억 달러짜리 제국은 그렇게 먼지가 됐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홈스는 교도소 안에서, 자신이 바꾸려 했던 세상의 뉴스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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